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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상식/기타

마이크 타이슨의 일대기


프로 통산 50승 5패의 전적을 기록했던 전설의 복서로 유명한  마이클 제라드 타이슨은

1966년 6월30일 뉴욕에서 태어났습니다. 


비둘기를 너무 사랑했던 마이크 타이슨는 10살의 나이에 돈을 저축해 비둘기를 사서 기르기 시작했다고 하네요.


11살의 나이에 불량 청소년들을 위한 소년원에 보내졌으며 거기서 전 권투 선수였던 소년원 책임자의 권유로 권투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13살이 되면서 경찰이 마이크 타이슨을  체포한 기록은 무려 38번이나 됩니다. 


그러던 어느날 한번 타이슨은 전설의 복서인 무하마드 알리와 마주치게 되는데 이것이 그가 권투를 자신이 가야 할 길이라고 인식을 갖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였다고 하네요.

1980년에 마이크 타이슨은 트레이너 콘스탄틴 커스 다마토와 일하기 시작하며 그 이후로는 계속 그가 타이슨의 트레이너였다고 합니다.



14살 되던 해 타이슨은 존 보직이 감독을 맡게 되며 결국 미들급 올림픽 챔피언이 됩니다. 

일년뒤 그는 미국 주니어 챔피언이 되며 1982년 드디어 첫 세계 주니어 챔피언의 타이틀을 쟁취합니다.




1985년에는 커스 다마토의 지도밑에 그는 프로 권투 선수로 데뷔합니다. 

첫 라운드에 헥토르 메르세데스를 쓰러뜨면서 그는 강철의 사나이('아이언 마이크')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1986년에 커스 다마토가 세상을 떠난 한달뒤 타이슨은 헤비웨이트급 세계타이틀(WBC)를 얻었습니다. 그가 거둔 13번의 승리중 가장 중요했던 순간은 그가 트레보 버빅을 이긴 순간이었다고 하네요.


1988년 마이크 타이슨은 모델이며 여배우였던 로빈 기븐스와 결혼 하지만 일년 후 이혼합니다.

이혼 절차를 밟는 동안 기븐스와 타이슨이 우연히 만난적이 있었는데 그때 당시 기븐스의 차안에는 브래드 피트가 있었다고 하네요. 

타이슨 말에 의하면 브래드 피트가 제발 때리지만 말아달라고 빌었다고 합니다.


1990년에 타이슨은 세계에서 가장 몸값이 높은 선수로 되였으며 당시 그의 가치는 마이클 조단을 뛰어넘었다고 하네요.




하지만 이혼은 곧 그의 선수생활에도 영향을 미쳐 1990년 일본에서 10 라운드 만에 버스터 더글라스에게 K.O. 당합니다.


1991년 그는 미스 아메리카 심사위원이었지만 '미스 블랙 아메리카' 강간 혐의로 고소당합니다. 그는 곧 체포되여 6년 징역에 처하지만 3년 후 풀려났습니다.


수감 중이었던 1992년에 타이슨은 이슬람교로 전환하여 이름도 말렉 압둘 아지즈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1995년에는 영화 '타이슨'이 만들어졌습니다. 주역은 마이클 제이 화이트가 맡았었네요.



수감 생활을 끝낸 후 그는 이밴더 홀리필드와의 대결로 링에 복귀하였습니다. 

1997년 경기당시 타이슨은 홀리필드의 귀를 물어뜯어 패배로 인정되였습니다. 

'핵주먹'이란 별명 대신 '핵이빨'이라는 별명이 생겨버린 이유이기도 합니다.





1997년 그는 모니카 터너와 결혼하여 2003년 이혼전까지 여섯아이를 낳았습니다.


2003년 8월에 그는 재정적인 문제에 직면하며 거의 파산 위기에 몰리게 됩니다. 일부여론에 의하면 당시 매니저였던 돈 킹의 잘못으로 이런 위기를 맞았다고 하네요.


하지만 비둘기에 이어 타이슨의 동물 사랑은 계속되었는데요. 그는 파산 신청을 한 뒤에도 애완용으로 4천 달러를 넘게 들여  3마리의 벵갈 호랑이을 구입하여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2005년 마이크 타이슨은 아일랜드 헤비급선수였던 케빈 맥브라이드와 마지막 경기를 벌이지만 세월을 이길 수 없었는지 K.O. 패배를 당하고맙니다.


타이슨은 프로전적에서 단 5번의 패배와 50번의 승리라는 엄청난 기록을 세웠으며 그 중 44번은 K.O. 라고 하네요.

 

그는 비록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어제도 오늘도 최고의 전설적인 권투선수 중 한명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