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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영화 배우

레게의 전설 밥 말리

'No Woman No Cry' 나 'This Is Love?' 와 같은 불멸의 노래를 남긴 밥 말리는 고인이 되었지만 아직도 전세계의 팬들을 거느리고 있는 레게의 상징입니다.

밥 말리는 롤링스톤지가 선정한 11번째 역대 위대한 예술가로 선정되었습니다. 

 

 

 

밥 말리로 잘 알려진 Robert Nesta Marley는 1945년 2월 6일 자메이카의 세인트 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가장 유명한 레게 뮤지션이자 그 장르를 대중화시킨 것으로 유명합니다. 

아버지는 영국군의 대위 였던 백인, 노발 싱클레어 말리 (Norval Sinclair Marley) 이고, 어머니는 자메이카 북부의 흑인 십대였던 시델라 부커 (Cedella Booker) 였습니다. 

부모의 결혼 후, 아버지는 어머니를 떠났지만 아내와 아들에게 재정적인 지원은 계속하였다고 합니다. 

1955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그녀는 밥 말리와 함께 킹스턴주의 가장 넓은 지역이자 가난한 곳인 트랜치타운으로 이사했습니다.

 

트랜치타운에서 그는 혼혈과 작은 몸집으로 인해, 지역의 흑인 커뮤니티에서 왕따를 당하고 거부되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밥 말리는 어릴때부터 음악과 함께 자랐습니다. 그와 그의 친구인 버니는 오일캔으로 기타를 만들어 연주하고, 미국과 특히 뉴올리언즈에서 흘러나오는 인기곡들을 듣고는 했습니다. 

그들은 레이 찰스, 팻츠 도미노, 또한 밥 말리가 아주 좋아하던 브룩 밴튼의 음악들을 듣고 자랐습니다. 그리고 드리프터즈 (The Drifters)와 같은 그룹도 들었는데요, 이들은 자메이카에서 아주 인기가 있었습니다. 

1962년 영국으로부터의 자메이카 독립은 자메이카만의 고유한 음악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됩니다. 

밥 말리가 14세에 학교를 그만두었을때, 그는 음악이라는 하나의 열정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직업이 없이 불량아가 될까봐 두려워했던 그의 어머니를 기쁘게 하기위해, 그는 용접공으로 취직합니다. 

 

1962년 밥 말리는 그의 첫 번째 레코딩인 'Judge Not'을 작곡하고 발매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곡들은 라디오 방송을 타지 못하고 대중의 관심을 거의 끌지 못했지만, 말리는 음악가로서의 열정을 확인했습니다. 

다음 해에 밥 말리는 밴드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친구들인 버니 웨일러스, 피터 토시와 함께 웨일링 웨일러스 (The Wailing Wailers)를 결성했습니다. 

웨일링 웨일러스는 1963년 말에 첫 싱글 'Simmer Down'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음 해 1월 자메이카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으며, 그 후에도 2개월 동안 그 자리를 유지했습니다. 

 

그 후 몇 년동안 그의 밴드는 히트곡을 몇 곡 더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겪었던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하나 둘씩 멤버들이 밴드를 떠나게 됩니다. 

이 때는 말리의 인생에서 결정적인 시기였는데요, 에티오피아의 황제인 하일레 셀라시에는 밥 말리가 없던 기간에 자메이카를 방문하였고, 래스터페리언 운동은 킹스턴 거리에서 힘을 얻었습니다. 밥 말리는 래스터페리언 정신과 문화에 심취하기 시작했습니다. 

 

 

1967년 밥 말리의 음악은 이미 그의 신념을 반영했습니다. 찬가를 불러주는 대신 사회 및 영적 신념에 관한 노래를 시작했으며, 이것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이자 가장 위대한 유산이 되었습니다. 

밥 말리의 음반들은 7천5백만장 이상 판매되었습니다. 

밥 말리는 사회 문제들에 대해 항의하고 이것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의 음악은 래스터페리언 운동 뿐만 아니라 평화, 형제애, 사회적 평등, 환경 보전, 해방, 저항, 자유 및 보편적 사랑에 대한 그의 아이디어를 다루었습니다. 

 

밥 말리가 국제적으로 명성을 쌓은 후 웨일러스와 같이 노래를 하기도 한 리타 말리와 결혼하였습니다. 그녀는 I-Threes 맴버 중 하나였습니다. 

리타는 밥 말리의 12명의 자녀(두 명은 입양) 중 4명의 어머니였습니다. 유명한 지기 (Ziggy)와 스티븐 말리 (Stephen)는 밴드 멜로디메이커(Melody Maker)를 조직해서 아버지의 음악적 유산을 이어갔습니다. 

 

밥 말리의 아이들인 카이-마니 말리 (Ky-Mani Marley), 줄리안 말리 (Julian Marley), 다미안 말리 (Damian Marley)도 음악가로 활동했습니다. 

밥 말리의 음악은 고국의 사회 및 정치적 문제를 크게 반영하면서 자메이카의 흑인, 가난한 사람, 억압받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하였습니다. 

빈곤, 전쟁, 유럽인들의 지배 등 아프리카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도 그의 노래 중 일부였습니다. 또한 아프리카는 래스터페리언 운동의 신성한 땅으로 간주되기도 하였습니다

 

폴 매카트니 (Paul McCartney), 믹 재거 (Mick Jagger)와 같은 스타들도 밥 말리의 작품에 찬사를 보냈습니다. 엘릭 클랩튼은 밥 말리의 'I Shot the Sheriff' 를 리메이크하여 차트에 올려놓았고, 이는 밥 말리와 웨일러스의 커리어에 도움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1974년 10월, 'Natty Dread'가 발표되었습니다. 밥 말리는 영국 차트에서 1위를 기록한 'No Woman No Cry' 트랙의 성공으로 더욱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 당시 밴드는 주디 모와트, 마르샤 그리핀스, 밥 말리의 아내인 리타 말리가 활동하던 I-Threes와 동행했습니다. 

 

1976년 'Rastaman Vibration' 앨범이 발표된 후 그는 미국에서 엄청난 성공을 이룹니다. 당시 자메이카에서의 그의 명성은 거의 신앙적인 수준이었습니다. 

 

 

 

그는 건강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와중에 1980년 9월 23일 피츠버그에서(밥 말리의 마지막 공연) 한번 더 공연을 치루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세계는 이 레게 스타가 그의 발톱 밑에서 발생한 악성흑색종이라고 불리는 피부암으로 고통받았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습니다. 

의사들은 그의 발끝을 절단할 것을 조언했지만, 밥 말리는 사람의 신체는 아무도 변형할 수 없는다는 래스터페리언 철학으로 인해 거부했습니다. 또한 수술이 그의 춤에 영향을 끼치는 점도 고려되었습니다. 

그의 암이 뇌, 폐 및 위로 전이되었습니다. 그는 독일로 가서 치료를 받으면서 8개월 동안 투병 생활을 했습니다. 밥 말리는 독일 의사의 자연적 치료로 인해 한때 안정화 된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의사가 더 이상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발표하고, 위중했던 밥 말리는 생의 마지막 날들을 친구들, 가족과 함께 보내기 위해 자메이카의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그는 그 여행을 마치지 못하고 마이애미의 병원으로 옮겨져서 1981년 5월 11일 사망하였습니다. 

 

사망한지 3년 후 발표된 편집 앨범인 'Legend' 에서는 이 아티스트의 많은 앨범에서 고른 노래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레게 앨범으로 기록됩니다. 

 

밥 말리는 우리를 떠났지만, 그의 유산은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노래하고, 기억하고, 오늘날까지 인용되고 있습니다. 밥 말리는 자메이카 문화와 래스터페리언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